창조한국당의 참담한 칼럼

[‘최장집 교수에게 소통과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에 대한 비판]

 
한국의 공론장에서 하버마스(J. Harbermas)가 말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아직까지도 너무나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우울함 탓에 패러디로 시작하겠다. “경향신문이 기획한 한 기사에 대한 창조한국당 소속 칼럼니스트의 비판은 참으로 참담했다. 그렇게 정당이 없는가? 아직도 창조한국당인가? 공부 안하는 칼럼니스트의 한계, 그리고 진보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한계를 본다. 이걸 대체 비판이랍시고 자랑스럽게 내놓은 ‘최장집 교수에게 소통과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얘기다.”

단언컨대, 이 글은 애초에 학적으로는 논할 가치가 거의 없는 글이다. 조선일보 사태를 거론하면서 그의 도덕적 ‘비겁함’을 추론하는 부분, 그리고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과의 관계로부터 어설프게 인물의 심중을 읽어내는 전개만 보더라도 애초에 이 글은 최장집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울고 갈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당도 아니고 최장집의 냉철한 조언을 받아들여도 간당간당할 창조한국당의 이데올로그가 이러한 칼럼을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정말 다른 당도 아니다. 따뜻한 CEO 대통령의 리더십과 중소기업 육성을 주장하는 당의 칼럼이 이 모양 이 꼴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따뜻한 CEO가 사원들을 감싸안는 풍경은 북조선식 선군정치. 게다가 공천파동에서 드러났듯 내가 결정하면 대다수 당원들은 따를 것이라 믿는 엘리트들의 복고적인 ‘소통구조’로 무장한 당의 칼럼이니까. 그 화룡정점은 자유선진당과의 원내교섭단체 구성 사태. 세상에나, “갈등”이 없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목표로 손을 잡았다나. ‘지도자’ 둘이서만 서로 흐뭇해하더라.(문국현 찍었던 나는 어찌하리) 물론, 이 야합은 한국 정당정치 역사에 길이 남을, “창조적” 코미디였다.  

이 전근대적 뜨거움. 그럼에도 이 글에 대한 비평을 시도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소통을 갈구하는 일반인 독자들이 최장집이 언급한 바 있는 “소수언론과 엘리트들”-그의 저서에 따르면 민주당류의 이데올로그들과 직접민주주의를 선동하는 세력이 여기에 해당한다-이 일삼는 데마고그의 그물망에 갇히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그런 의미에서 창조한국당의 칼럼은 좋은 반면교사다) 최장집의 이 기고문에는 ‘민주주의’ 3부작(『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민주화』, 『어떤 민주주의인가』)을 비롯한 과거의 연구들이 복합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물론 약간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채 최장집의 저서에 관심을 가져왔던 필자로서도 이 글이 다소 산만하게 비쳤던 것은 사실이다. 기고문치고는 용어의 혼동마저 있어서 독자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다만 흔치않은 분량의 ‘특별’기고문으로서 더 많은 고민을 가져다주리라는 위안 정도는 얻을 수 있겠다. 그런데 젊은이들을 어필하겠다던 신생정당의 칼럼니스트쯤 해먹으려면, 대학수업을 위한 교재로도 많이 사용되는 저 책들 중에서 최소한 한 권은 꼼꼼히 읽어보고 비판을 시도했어야 하지 않을까? 

글에 악감정 이외에 논리 따윈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에게 “사전에 정해진 어떤 의사, 가치를 위로부터 부과하”면서 “성급하게 시민을 가르치려는” “소수언론과 엘리트들”로 찍힌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이 심지어 불쌍해 보일 정도이다. 오, 희생양이여! 물론 MB와 한나라당 혹은 조중동이 잘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들만을 무턱대고 악마화함으로써 책임을 방기하는 무능한 개혁세력들의 못된 버릇이다. 이들의 대안 없는 정치적 선동이야말로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이 쑥쑥 자라게끔 하는 미래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강렬했던 87년 민주항쟁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도 하부구조, 즉 보수적 정당체제라는 매트릭스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최장집은 그람시(A. Gramsci)의 개념을 빌어 이것을 “수동혁명”이라고 규정하며, “지역정당 체제” 혹은 “인물”이 중심이 되는 “지도자-엘리트들의 연결망”으로 고착화됐을 뿐이라고 진단한다. 이때 선거 경쟁력은 사회경제적 이슈를 둘러싼 “정책 프로그램의 차이”보다는 “인물 중심” 또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따라 판가름 나며, 그럴수록 진보정당은 억압되고 보수정당들 간의 “적대적 정치”만이 강화된다는 것이다.(『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2008)  

개혁정당이라 자부하던 과거 열린우리당이 사회경제적 이슈보다는 국가보안법이나 남북문제, 친일 및 과거사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문제에 유독 집착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지금도 이들은 미디어법안에는 목숨을 걸지만, 금융지주회사법에 대해선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민주노동당 역시 이들과 함께 반한나라당 연합을 어떻게 성취시킬 것인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수많은 갈등축의 대립과 경쟁을 전제로 하는 정치는 이런 이분법적 갈등이 만들어내는 진영논리, 즉 MB를 악마화함으로써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미화”하는 언설에 의해 실종된다.   

이런 논리로는 당연히 지방선거 때 노회찬 후보를 공개지지하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한국 사회 최상위층의 지배와 개발독재식 밀어붙이기 정책추진”은 “독재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일갈했던 최장집이 어떻게 이명박 정부를 ‘보수정부’이지만 ‘반민주주의’는 아니라고 학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국회의 헤게모니를 쥔 집권정당을 독재세력의 수족으로 규정함으로써 의회를 악마의 소굴로 만들수록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유감스럽게도 민주주의는 대의제에 기반하며, 복수 정당들간의 투표의 결과라는 최소주의적 정의와 사회경제적 차별을 완화해야한다는 최대강령적 정의가 모두 가능하다. 후자에 의해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최장집의 지적대로 그 이전의 민주정부들도 역시 반민주적인 정부가 되어야 마땅하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밀고나갔으며,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뻔뻔스럽게 “양극화 논리”를 펴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이들은 반성은커녕 눈알을 반쯤 뒤집은 채 ‘반민주주의’ ‘파시즘’과 같은 최대강령적 슬로건만을 내세우며 길거리 운동의 정치를 선동한다. 이쯤 되면 뉴라이트를 등에 업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이 만들어나가는 신우파적 프레임이 오히려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다. 과거 반독재 투쟁의 유일한 미덕이었던, “최대 정치연합”의 “도덕주의”, 또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식의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이건 그나마 봐줄만 하다. 이 칼럼에서 압권은 “노무현 정부로부터는 러브콜을 받지 못했으니 원망”이 있어서, 아니면 “이 정부를 민주적이라고 평해서 앞선 정부들을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고 싶”어서, 그리고 “공정한 심판자라도 되는 양 필명을 날”리고 싶어서 최장집이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고수하고 있다는 데에 있는데, 이걸 논리라고 가져다 붙이는가? 베버(M. Weber)에 따르면 정치적 판단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심정윤리’라는 게 있는데, 바로 저런 말들이다. 물론 ‘영구와 공룡 쭈쭈’에서나 가능할 반지성주의적 궤변이다.  

그 뒤에 MB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나열한 수많은 통계들, 이를테면 KDI 보고서가 보여주는 빈곤층의 비율이나 비정규직 문제들은 일일이 반박할 가치도 없다. 이 폐악의 대부분을 MB정권의 탓으로 보는 ‘용기 있는’ 시각만은 높이 사줄 수 있겠으나 유감스럽게도 학문적 근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우석훈을 비롯한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저서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노동이나 경제관련 양극화 지표들에 대해선 이전 정권들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유권자들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한나라당은 최소한 네거티브로 일관했던 민주당보다는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최장집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자. “야당(들)은 여당의 실패를 통해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점에서 이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만들어진 최대 민주연합을 강요하는 담론과 운동을 통해 그동안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의 소리나 여러 사회집단의 의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 토대 위에서 이를 결집하는 방식으로 다수를 형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라는 외부적 상황 탓에 국가는 대기업의 운영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더욱더 관료제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 민주정부들 역시 이 구조를 변화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이를 핑계 삼아 어느 순간부터는 투표자로부터의 책임을 스스로 방기했다. 이런 자의적 권력 행사를 예방하기 위해 최장집이 제시하는 “다원적 토대 위에서 결집하는 방식으로 다수를 형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란 이런 권력을 견제하며 보다 폭넓은 사회계층을 대표해줄 수 있는 정당정치의 정착을 의미한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평등한 인민이 주권자가 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가치가 아니라, 피치자인 인민의 동의를 확보하면서 그들의 의사들을 제대로 대표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현실적 가치이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라는 최장집의 결론은 그런 의미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셈이다. 평등한 소통에 대한 막연한 강조는 합리적 대중 혹은 다중이 정당이나 국가기구 밖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환상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는 끝내 모두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는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해준다. 

“19세기 말 이래 대륙의 의회와 정당의 평판은 꾸준히 떨어졌다. 대다수의 국민에게는 의회와 정당이 비싸고 불필요한 제도처럼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어떤 집단이 정당과 계급을 초월한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의회 밖에서 출발한다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런 집단들은 더 능력 있고 더 성실하며 공적 사안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겉모습뿐이었다. ‘정당을 초월한 정당’의 진정한 목표는 자신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관철하여 다른 이해관계들을 모두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의 특별한 집단이 국가 기구의 지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서 일어났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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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은 추모의 열기로 뜨겁다. 죽은 자는 산 자로부터, 산 자는 죽은 자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고인은 세상을 훌훌 털고 떠나고자 했지만, 지금의 과잉된 열기는 결코 고인을 그렇게 놓아주지 않고 있다. 갑자기 전례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슬퍼하는 조문객들도 서로 당황하고 있다. 촛불들도 다시금 부활하고 있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분노 역시 함께 되돌아왔다.

물론 이 원인을 현 정권이 스스로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의 방식은 자신을 버리라던 고인의 바람과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하다. 현재의 비정상적인 분위기는 왠지 고인을 더욱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이 '현상'은 전 국민적 추모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아련한 분위기 속에 잠겨서 꾸는 몽상은 아닐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털어내고 이제는 다른 얘기를 할 때이고, 냉철히 현상을 짚어볼 때이다. 갑자기 이 행렬들은 추모 속에서 왜 자신들이 한때 증오했던 '노무현'을 다시금 불러들이고 있는가? 왜 이들은 스스럼없이 노무현을 그가 생전에 그토록 기피했던 황제로 영웅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하는가? 이 과정에서 그의 죽음은 역사성을 상실한 채 일상 속 넘쳐흐르는 냉소와 분노를 승화
시키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무현이라는 유령은 이승을 떠나지 못한 채 그렇게 배회하고 있다. 작년 촛불시위에서 대중들을 시민이자 국민으로 호명했던 것이 다름 아닌 미국산 쇠고기였던 것을 상기해보자. 그렇게 본다면, 미국산 쇠고기 대신에 '노무현'이라는 상징으로 촛불이 되돌아오는 현상 역시 강박적으로 반복되는 무언가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 행렬들 속에는 슬픔과 분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쾌락이 있고, 즐거움이 숨어있다. 이것도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것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치던 작년 촛불시위의 우울한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각종 정보들이 돌아다녔고 감정을 넘쳐흘렀지만 정작 중요한 이슈와 문제제기들은 아래로 잠기고 말았다.

지금도 인터넷은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으로 넘쳐나고 추모를 방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로만 가득 차 있다. 이로써 언론과 시민들은 고인의 죽음과 인간미 속으로 관음증적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것 역시 촛불의 '배후'를 운운하던 반동적 보수언론을 질타하던 이들이 그 뒤뜰에서 좀 더
고상하게 촛불의 '구성'―운동권과 대책위를 포함하느니 마느니 따위―을 문제 삼곤 했던 것의 반복일지 모른다. 이것은 용산참사의 진압과정 혹은 거기에 놓여있던 시위도구들을 의심쩍게 바라보던 폭력적 시선의 반복이기도 하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작년 이랜드 노조의 투쟁과 같은
노동문제는 결코 길거리 촛불시위의 의제에 포함되지 못했고, 용산참사는 그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환기시켜낼 수 없었다. 전기가 끊겨버린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집에서 촛불을 켜고 있을 때 우리는 '시민'의 이름으로 노래를 부르며 길거리를 행진하고 있었고, 현재 추모의 촛불이 한창인 와중에도 곳곳에 죽음의 망루는 지어지고 있다.

▲ 2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의 노제. ⓒ프레시안

냉정하게 따지자면, 이 추모는 더 이상 추모가 아닌 축제가 되었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여기에 '정치'나 '민주주의'는 여간해선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개인의 일상을 옥죄어오던 은밀한 배제의 원리가 사회적 약자에게 거꾸로 작동하고, 여기서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깃발을 세운 노동자들에 대한 반감은 잠시 해소될 때도 있었지만, 어찌 보면 이는 언제나 존재하는 상수였다. 니체의 말마따나 괴물과 싸우면서 자신도 닮아가고 있었던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른바 2002년 이후 반짝했던 '노무현 열풍'과 그로부터 7년 후 지금의 추모와 숭앙의 열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신기한 것은 탄핵 정국 전후의 촛불이 보여주었던 과도한 열기는 먼 시간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에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과잉된 열기는 앞서 지적했듯 '정치'에 대한 냉소에 다름 아니며(당시에도 추악한 정치권으로부터 노무현을 지킨다고 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어떤 대용물에 대한 과도한 감정이입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며칠 전 일군의 정치인들이 '봉하마을'로부터 추방당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것은 이른바 '국익'을 대표하던 황우석에 반대했던 <PD수첩>에 대한 증오로 표출되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심형래의
대작을 비판했던 평론가들에 대한 분노와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노무현의 소멸에 어떤 숭고함을 부여함으로써 환상 비슷한 것을 지탱해나가고 있다. 이것 또한 반복되어온 현상이다.

이것이 바로 추모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비록 정권의 성격은 바뀌었지만, 경제와 사회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은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노무현 시대 때도 엄연히 작동해왔던, '사회적 죽음'을
양산하는 메커니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결여된 채 지금은 분노와 슬픔만이 넘실대고 있다. 이는 '정치'에 대한 대안 없는 냉소로 귀결될 뿐이고 사람들을 잠깐 동안 길거리로 나오게 할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또다시 실망과 냉소에 의해 이들을 길거리로부터 철수시킬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열정과 실망의
사이클 속에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의 죽음이 소박한 수준에서 애도되면서 다른 죽음들과 함께 보듬어졌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노무현 정권은 추진하려던 정책들을
재고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와 같은 경제 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랐던 것이고, '사회적 죽음'의 진짜 기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MB탄핵"을 외치면서도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모든 게 노무현 때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최근 쌍용자동차의 해고문제로 빚어진 한 노동자의 죽음과 화물연대 박종태 씨의 죽음이 마냥 현 정권의 실책 탓만은 아닌데도 말이다.

하지만 고인에 대한 마지막 기도는 과도한 추모와 숭앙이 아니라, 그 '사회적 죽음'의 원인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민하고 반성하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도 추모가 끝나는 순간부터는 결코 고인으로써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일 테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아닌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를테면 노무현보다 더 무기력하고
유약하게 쓰러져갈 약자들-을 고민해야 하고, 빼어난 정치인이자 인간성을 간직했던 이의 '죽음' 자체가 아닌 그 죽음 이후의 '정치'를 고민해야 한다. 그 말은 곧 노무현이 지나왔던 시대를 처음부터 끝까지 냉철히 반성하는 일일 테고, 정말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금은 돌아가신 '인간 노무현'에게 다해야 할 예의도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요컨대, 마치 노무현의 반대가 MB라도 되는 것-앞서 경제 정책을 지적했듯 결과적으로 둘은 정책적으로 친화적이었던 부분이 많았다-처럼 'MB탄핵'을 외침으로써 '노무현'이라는 환상을 지탱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무현이 탄핵되던 그 초라한 시점으로 돌아가 이후의 정책을 고민해가며 새로운 정치의 지도를 차분히 그려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 반동적 세력들이 '바보 노무현'의 자살을 비아냥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우직하고 '바보'스런 추모판에 조금씩 어깃장을 놓기 시작해야 한다. 진정 미래에는 이러한 불행한 죽음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고 이 추모의 행렬이 만들어내는 슬픔과 냉소 속에 머문다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지금의 '노무현 효과'를 톡톡히 누릴 이는 어쩌면 MB와 한나라당일지 모른다.

끝으로 소박한 개인적 느낌 하나를 밝혀두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 최대한 냉철하려 마음먹으면서도 고인 앞에 손끝이 떨려왔던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에 적힌 "
운명이다"라는 말과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주는 어떤 울림 때문이었으리라. 왜 우리는 서로 믿고 배신당하면서도 또 믿고 새로이 삶을 시작하는 것일까. 아마 같은 인간이기 때문일까.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어쨌든 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곧 후회하게 될 테니까요.…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현재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보다 한층 쓸쓸한 미래의 나를 참는 대신 쓸쓸한 지금의 나를 참으려 합니다.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에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그 대가로 모두 이 쓸쓸함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츠메 소세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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